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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rnière mise à jour
2024-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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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oconda Vito Johannes Brahms Martzy Neveu Haendel Morini Sabata Benedetti Benedetti Michelangeli Mainardi Menuhin Stern Fischer Weingartner Philharmonia Orchestra 1833 1863 1886 1889 1892 1897 1904 1907 1908 1916 1919 1920 1924 1928 1931 1932 1934 1940 1942 1946 1947 1948 1949 1950 1952 1959 1960 1961 1967 1976 1977 1979 1988 1989 1991 1994 1995 1997 1999 2001
Johannes Brahms +••.••(...)) 00:00 1. I. Allegro non troppo (Cadenza by Joachim) 23:11 2. II. Adagio 34:08 3. III. Allegro giocoso, ma non troppo vivace Gioconda de Vito, violin Philharmonia Orchestra Rudolf Schwarz, conductor Amadeo Valdovino, cello Sound sources: CD - Gioconda de Vito Plays Brahms Manufactured by WOONGJIN Media Corp in Korea Licensed from EMI Music Korea. This compilation 1997 by EMI Music Korea. 이탈리아 출신의 지오콘다 데 비토는 194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초까지 전성기를 누렸던 연주자이다. 그녀가 활동했던 시기는 요한나 마르치(Johanna Martzy, 1924-1979), 지네뜨 느뵈(Ginette Neveu, 1919-1949), 이다 헨델(Ida Haendel, 1928- ), 에리카 모리니(Erica Morini, 1908-1995) 등 많은 여성 바이올리니스트들이 뛰어난 연주를 남겼던 시기였는데, 데 비토는 그 중에서도 앞선 세대의 연주자로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음반을 많이 남기지는 않았는데, 데 비토가 남긴 음반들은 모두 콜렉터들의 수집대상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바이올린의 여왕 데 비토는 1907년 7월 22일 이탈리아의 마르티나 프랑카(Martina Franca)에서 태어났다. 7살 때 동네에 있던 작은 악단의 지휘자에게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해서 11살 때 페사로의 '롯시니 음악원(Rossini Conservatory)'에 입학하여 레미 프린치페(Remy Principe, 1889-1977)에게 배웠는데, 2년 동안 모든 상을 수상하며 페사로 음악원을 졸업할 정도로 재능이 뛰어났다. 졸업 후에는 로마에서 데뷔하였고, 이후 3년 정도 별다른 교육을 받지 않고 독학으로 레퍼토리를 넓혀나갔다. 1924년에는 바리 음악원의 바이올린과 조교수가 되었으나 얼마 후 사임했고, 활발한 활동을 할 거라는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내성적인 성격의 그녀는 거의 10년 동안 무대에 서지 않았다. 하지만 1931년에 파리에서 토스카니니 앞에서 바흐를 연주하여 절찬을 받기도 하였으며, 1932년 25살 때는 빈에서 열린 국제 바이올린 콩쿠르에 참가하여 우승하기도 하였다. 이 콩쿠르에서 악기상태가 좋지 않아서 다른 사람의 바이올린을 빌려서 연주했음에도 불구하고 350명의 경쟁자들을 제치고 우승했다는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콩쿠르 우승의 후광으로 그녀는 1934년 로마의 유명한 싼타 체칠리아 음악원(Accademia di Santa Cecilia)의 바이올린과 종신교수에 임명되었고, 독일에서 여러 차례 공연하면서 명성을 높여 미국 데뷔 공연까지 계획됐지만 전쟁으로 인해 그녀의 활동은 이탈리아와 독일로 국한된다. 1942년에는 로마에서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함으로써 독재자 무솔리니의 총애를 받으며 이탈리아 바이올린의 여왕으로 떠오르기도 했다. 데 비토의 연주는 여유로우면서도 힘이 있고 화려한 연주이며, 반면 실내악에서는 내성적이고 치밀한 연주를 들려주고 있다. 기교도 물 흐르듯 막힘이 없으며 특히 두툼하면서 아름다운 중음이 일품이다. 2차 대전이 끝나고 데 비토는 1946년 영국을 방문하여 EMI의 프로듀서 데이비드 빅넬(David Bicknell)과 만난 것이 계기가 되어 EMI와 계약하고 1947년 런던에서 바흐의 [샤콘느, Chaconne]를 녹음했는데,이 연주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녀의 이름을 각인시킨 명연이었다. 그리고 이런 인연으로 빅넬(David Bicknell)과 결혼하였고 영국시민권을 얻어 영국에 영주하였다. 1948년에는 빅토르 데 사바타(Victor de Sabata, 1892-1967)의 지휘 아래 런던 필하모닉과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처음 공연했다. 이 협주곡은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레파토리의 하나였으며, 그녀의 브람스는 이미 정평이 나 있었다고 한다. 같은 해 에딘버러 음악제에서는 피아니스트 아르투로 베네데티-미켈란젤리(Arturo Benedetti Michelangeli, 1920-1995) 및 첼리스트 엔리코 마이나르디(Enrico Mainardi, 1897-1976)와 함께 푸르트뱅글러 지휘와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베토벤의 [3중 협주곡, Triple Concerto]을 연주했다. 이어서 바이올리니스트 예후디 메뉴힌(Yehudi Menuhin, 1916-1999), 아이작 스턴(Isaac Stern, 1920-2001)과 영국 및 아일랜드를 순회 공연하기도 했다. 이후 데 비토의 명연들은 EMI 레이블을 통해 속속 녹음되었는데, 베토벤의 [로망스], 바흐와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협주곡], 그리고 피아니스트 에드윈 피셔(Edwin Fischer, 1886-1960)와 함께 연주한 브람스의 [바이올린 소나타] 등 많은 음반이 발매되었다. 1952년에는 토리노 방송국에서 푸르트벵글러와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하기도 했고, 957년 로마 교황청에서 바흐를 연주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1961년 54세의 나이로 은퇴를 선언했고, 후 콩쿠르 심사위원은 간혹 맡았지만 다시는 무대에 오르지 않았다. 은퇴 후에는 런던 인근의 작은 마을에서 남편과 함께 여생을 보내다가, 1988년 결혼 40년만에 남편을 잃었는데, 1991년에 그녀를 만난 툴리 포터(Tully Potter)에 의하면 남편 빅넬을 '신이 보낸 선량한 사람'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금슬이 좋았다고 전한다. 87세의 나이로 1994년 10월 14일 로마에서 사망했다. 그녀의 공식 녹음은 실제적으로 1948~59년 런던 애비 로드 EMI 스튜디오에서 녹음한 LP 약 12장 분량이 전부다. '2차 대전 후 최고의 여류 바이얼리니스트'라고 불리던 그녀 전성기의 명성을 생각하면 결코 많다고는 할 수가 없는데, 그녀나 남편 빅넬이나 모두 빅넬의 지위를 이용하여 EMI에서 특히 많이 녹음한다든가 하는 생각도 해 보지 않았을 정도로 원칙을 지키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녀가 한창 절정기 때 은퇴하고 다시 돌아오지 않아서인지, 이상하게도 미국과 유럽에서는 LP로는 그녀의 레코드를 보기가 쉽지 않다. 복각 음반사로 유명한 테스타멘트(Testament) 레이블에서는 회사 발족 초기에 [브람스 소나타] 3곡을 냈고, LP는 지휘자 라파엘 쿠벨릭과 협연한 바흐 2번/모차르트 3번을 내놓긴 했지만 후속 발매가 없는 점을 보아 이 점에서는 그다지 만족스럽지는 못하다. 하지만 일본은 예외였다. 그녀의 EMI 전 녹음은 LP 전집으로도 나왔으며, CD 시대에 들어와서도 역시 전집으로 2번 발매되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일본 발매를 라이선스하여 브람스 녹음만 따로 2장 세트로 나오기는 했지만 지금은 폐반되었다고 알고 있다. 전에 얼마간 한국 EMI가 수입했던 바인가르트너(Felix Weingartner, 1863-1942)나 요한나 마르치(Johanna Martzy)의 일제 발매처럼 5-6장 정도면 그래도 괜찮은데, 9장이나 되기 때문에 수입하기도 아마 벅찰 것 같다. LP로는 그녀의 음반 가격이 장당 최소 20만원을 넘는다고 하니(솔직이 희귀성 때문이다. 이렇게 값이 높을 이유가 또 있을까) 좋건 싫건 금전 효율을 생각하면 이 일제 전집이 최상의 선택일 수밖에 없다. 브람스의 두 곡의 협주곡(바이올린 협주곡, 2중 협주곡)중에서는 [2중 협주곡]이 명연이다. 소나타는 거장 에드빈 피셔(Edwin Fischer, 1886-1960)와 1, 3번을, 그녀의 반주를 오래 맡은 티토 아프레아(Tito Aprea, 1904-1989)와 2번을 협연했다. 다비드 오이스트라흐가 스비아토스라프 리히테르와 함께 워낙 굉장한 연주를 들려 주기 때문에 첫째로는 추천 못하겠지만, 모노랄이란 점만 제외하면 피셔나 비토의 팬들에게는 꼭 갖춰 놓아야 할 연주다. 베토벤으로는 [로망스 2번](에레데 지휘)과 아프레아 협연의 [소나타 7, 9번]이 전부이다. 그녀가 은퇴 후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 녹음을 못한 점을 아쉬워했다고 전하는데, 그녀가 브람스와 베토벤의 협주곡으로 명성을 얻었음을 고려하면 확실히 아쉽다.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크로이처]는 인상이 아주 강했는데, 솔직이 다른 사람들의 연주와 상당히 달라서 들으면서는 다소 당황했다. 베토벤 녹음으로는 [소나타 7, 9번]과 [로망스 2번]만 남아 있는데, 9번은 독특한 감각의 연주가 나름대로 멋이 있다. [로망스]는 1948년의 78회전 복각 녹음인데, 솔직이 일본 자체 복각의 질이 '그저 그렇기' 때문에 몇 년 후에 녹음된 마르치의 연주가 더 추천할 만하다. 비토는 바흐 [바이올린 협주곡 2번]과 모차르트 [바이올린 협주곡 3번]을 아주 좋아했던 듯, 40년대 말의 78회전 녹음 외에도 1959년에 쿠벨릭과 다시 녹음했는데 이 음반이 그녀의 스테레오 녹음으로는 유일하다. 비토는 이 시기에 예후디 메뉴힌과 많이 녹음했다. 바흐 [2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과 슈포어, 헨델 등의 [바이올린 2대를 위한 곡] 등을 녹음했으며, 바흐보다는 실내악곡들에 비토의 여유 있는 템포가 더 잘 어울리는 느낌이 든다. 이 외에는 멘델스존과 비오티 [22번 협주곡]과 바흐 [무반주 파르티타 2번], 프랑크 [바이올린 소나타] 등이 있으며, 이 중 비오티의 [바이올린 협주곡 22번]의 연주가 좋은 편이다. [무반주 파르티타]는 한 번에 종합하여 녹음하지 않고 [샤콘느]만 1947년, 나머지는 1950년에 두 번 녹음했기 때문인지 서로 음질도 차이가 있어서 위화감이 있다. 프랑크의 [바이올린 소나타]도 역시 아프레아와 협연했는데, 베토벤의 [크로이처] 이상으로 개성이 강해서 적응하려면 좀 더 들어보아야 할 것이다. - 글의 출처: 이영록의 음악이야기에서 부분 발췌했습니다 - #GiocondaDeVito #Brahms
Beethoven Olivier Charlier Bach Rondeau Closel Boulanger Menuhin Thibaud Neveu Sydney Symphony 1961 1989 1997
Ludwig van Beethoven 00:45 1. I. Allegro ma non troppo 25:37 2. II. Larghetto 35:14 3. III. Rondo. Allegro 46:17 Encore : Bach Violin Partita No. 3 in E Major, BWV 1006, III. Gavotte en rondeau Olivier Charlier, violin Atellier Lyrique et Symphonique du Centre Amaury Du Closel, conductor January 11, 1997 올리비에 샤를리(Olivier Charlier)에는 1961년에 태어나 14살의 나이에 이미 콩쿠르에서 입상하였고, 파리음악원에서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였던 장 위보(Jean Hubeau)에게 실내악을, 저명한 바이올리니스트였던 피에르 두캉(Pierre Doukan)으로부터 바이올린을 공부하였다. 그의 뛰어난 재능은 나디아 블랑제(Nadia Boulanger), 예후디 메뉴인(Yehudi Menuhin) 그리고 헨릭 쉐링(Henryk Szeryng)과 같은 위대한 아티스트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샤를리에는 17살에 뮌헨 콩쿠르, 18살에 몬트리올 콩쿠르, 19살에 시벨리우스 콩쿠르에서 각각 입상한 후, 20살엔 자크 티보와 SACEM 게오르게 에네스쿠상, 21살에 인디아나 폴리스, 그리고 1989년 뉴욕의 영 콘서트 아티스트 오디션과 같은 가장 권위 있는 국제 바이올린 대회에서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어린 나이부터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한층 성숙한 그는 곧 자크 티보(Jacques Thibaud), 지네트 느뵈(Ginette Neveu), 그리고 크리스티앙 페라스(Christian Ferras)로 이어지는 프랑스 바이올린의 계보를 이어갈 수 있었다. 이후 샤를리에는 프랑스 국립 오케스트라(Orchestre National de France), 파리 오케스트라(Orchestre de Paris), 스위스 취리히 톤할레 오케스트라(Zurich’s Tonhalle Orchestra), 헤이그 필하모닉(Hague Philharmonic), 런던 필하모닉(London Philharmonic), BBC 필하모닉(BBC Philharmonic), 할레 오케스트라(Hallé Orchestra), 베를린 심포니(Berlin Symphony), 함부르크 및 자르브뤼케 라디오 오케스트라(Hamburg and Saarbrücken Radio Orchestras), 뷔르템베르크 체임버 오케스트라(Württemberg Chamber Orchestra), 몬테카를로 필(Monte Carlo Philharmonic), 프라하와 자그레브 필하모닉 오케스트라(Prague and Zagreb Philharmonic Orchestras), 몬트리올 심포니(Montreal Symphony), 요미우리 니혼 및 시드니 심포니 오케스트라(Yomiuri Nippon and Sydney Symphony Orchestras)를 포함한 많은 오케스트라와 솔리스트로 협연해 왔다. 현재 올리비에 샤를리에는 파리 국립 고등음악원(Conservatoire National Supérieur de Musique et de Danse de Paris)에 재직중이다 그는 나의 맏딸 지영이 파리고등음악원(Conservatoire National Supérieur de Musique et de Danse de Paris) 재학시 스승이기도 하다.
Ernest Chausson Ginette Neveu Issay Dobrowen Philharmonia Orchestra London 1855 1899 1946
Ernest Chausson +••.••(...)) Poème op. 25 Ginette Neveu, violino Issay Dobrowen, direttore Philharmonia Orchestra London, 1946
ou
- chronologie: Interprètes (Europe).
- Index (par ordre alphabétique): N...